사생 대회

 

고등학생이 되던 그해 5월인가 6월인가 경복궁에 사생대회를 갔습니다.

요즘 아이들도 학교에서 사생대회를 하는지 가끔 집 근처 공원은 중학생들로 꽉 찰 때가 있습니다.

우리 시절과 마찬가지로 몇몇이 모여서 글을 그리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걸어다니던 제 모습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림에는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학교가 정한 제목 중에 마음에 드는 ‘길’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습니다.

당시 제 생각에는 제가 좋아하는 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입상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내옆에있던상철이라는남자는입상을했는데시를보면그냥미사여구만모았을뿐시속에담긴시인의마음은느껴지지않았어요.그래서 상을 받은 뒤 상철에게 쓴 시 구절의 의미가 뭐냐고 물었더니 전혀 설명이 안 되는 모습에 이런 놈에게 상을 준 학교 측이 한심하더라고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면 10대 소년이 쓴 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두워서 상을 주기에 부적합하거나 심사위원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하지만 자신을 무척 사랑하는 어린 마음에서 자신을 선택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갖게 되어 아무 상관도 없이 입상한 친구만을 나무랐습니다.

 

빈 잔에 병을 기울여 그리움을 채우다

밤은 어둡고 낮은 밤이고 길은 너무 멀다

나는 가난해서 가진 돈이 없다

무음의 바이올린과 잉크가 나오지 않는 만년필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

나는 이것들을 짊어지고

밝고 어두운 먼 길을 지나 초록 밝은 내일을 향해 내일로 간다

87.

 

어둡고 밝지 않은 시 내용이 상을 주는 게 마땅치 않았다고 내심 위문했지만 그래도 내겐 딱 맞는 시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시에서빈그릇은바로나자신이므로병을기울여그리움을채우길바라지만갖지못하고이루어질수없음을바라본다는뜻입니다.

그리움을 채우면 그것이 채워질까요? 그래도 그리워해 보고 싶은 마음에 허망함에 몸부림치는 당시 나의 심정을 빈 잔에 그리움을 채우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밤에는 어둡고 낮다는 것은 현실이 여의치 않다는 것입니다.

밤에는어두워서가는길이보이지않고밝은낮에하기에는내마음이밝은길에익숙하지않아서길이너무멀고어렵게느껴진다는것이죠.거기에 내가 느끼고 있는 현실이란, 지극히 가난하고 무기력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때의 마음과 상황을, 소리가 나지 않는 바이올린과 잉크 나오지 않는 만년필,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처럼 있어도, 쓸데없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상태를 비유한 것입니다.

」그때는 이렇다 할 비전도 없고, 또 공부를 하고 있어도, 때때로 가슴에 파고드는 허무와 염세적인 생각은.하지만 두렵기도 하고 기대도 있는 삶이라는, 먼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은 그때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는 희망찬 내일을 향해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길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길’이라고 주어진 시제에 맞게 나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시를 통해 비록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경복궁 한구석에서 10분간 시라는 카메라로 당시 마음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그렇게 10분간 시를 썼고, 나머지 시간은 경복궁을 돌아다니며 장난을 치거나 다른 친구들을 방해하며 하루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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